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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대사를 만나다

소개

밀양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가 태어난 고장이다. 밀양의 동서 축을 이으며 사명대사 생가지, 표충비, 표충사 등 사명대사의 유적이 이어진다. 사명대사가 태어난 생가가 남아 있는 생가지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표충비, 사명당의 위패가 모셔진 표충사 등 승병장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선 사명당의 일대기를 따라가볼 수 있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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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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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명대사 생가지
사명대사 생가지

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사명대사)이 태어난 곳이다. 사명대사가 1544년(중종 30)에 진사 임수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가출하여 직지사 신묵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당인 숙청사와 사명대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인 육영당, 사명대사가 거처하던 사랑채인 사명당 등이 남아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명대사가 가끔 고향으로 방문할 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고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는 사명대사의 조모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사명대사는 13세의 나이에 유촌 황여헌 선생에게 글을 배우다가 ‘세속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인가?’ 하고 그 해 가을 황악산 직지사로 가서 신묵화상에게 머리를 깎고 선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며,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광해군 2년(1610) 설법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저서로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2 표충비
표충비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위치한 비각으로 사명당 송운대사를 일명 사명대사비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이끌어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000명을 환국 시킨 유정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즉 표충사의 동쪽인 이곳에 1742년(영조 18) 대사의 5대 법손 남붕이 경산에서 갖고 온 돌로 건립하였다. 비신과 화강암의 비개를 갖추었고, 경주석재인 빗돌은 까만 대리석이며 좌대석과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기허[驥虛]대사의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표충사[表忠祠]에 대한 내력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글씨는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쓰고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하였다. 표충비가 유명해진 이유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비신에서 땀이 흘렀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마치 구슬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이곳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한다. 그래서 ‘땀 흘리는 표충비’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밀양 얼음골과 만어산어산불영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로 일컬어진다.

3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

밀양 남천강 옆 아동산에 위치한 영남루는 국보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동서 5간, 남북 4간의 팔작지붕에다 좌우로 2개의 딸린 누각을 거느린 이 거대한 2층 누각은 신라의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건물인 소루였으나, 영남사가 폐사되고 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그전부터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8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운 것이다. 부속건물로 능파각, 침류각, 사주문, 일주문, 천진궁이 있으며 영남루 누각에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당대 명필가들의 작품들이 편액으로 즐비하게 남아 있고 뜰에 깔린 석화 또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영남루의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 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 중에 하나로 선정되었다.

4 만어사
만어사

해발 674m인 만어산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대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해 주는 전통사찰로 많은 전설과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영험이 있었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왕의 공불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 명종 10년(1180)에 처음 건립하였고,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만어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있으며, 양산지역 옥지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악귀가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다.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소리를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고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만어사 앞에 있는 돌을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하며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밀양시 문화관광)

코스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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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사명대사)이 태어난 곳이다. 사명대사가 1544년(중종 30)에 진사 임수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가출하여 직지사 신묵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당인 숙청사와 사명대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인 육영당, 사명대사가 거처하던 사랑채인 사명당 등이 남아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명대사가 가끔 고향으로 방문할 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고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는 사명대사의 조모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사명대사는 13세의 나이에 유촌 황여헌 선생에게 글을 배우다가 ‘세속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인가?’ 하고 그 해 가을 황악산 직지사로 가서 신묵화상에게 머리를 깎고 선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며,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광해군 2년(1610) 설법을 마치고 세상을 떴다. 저서로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2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위치한 비각으로 사명당 송운대사를 일명 사명대사비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을 이끌어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000명을 환국 시킨 유정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즉 표충사의 동쪽인 이곳에 1742년(영조 18) 대사의 5대 법손 남붕이 경산에서 갖고 온 돌로 건립하였다. 비신과 화강암의 비개를 갖추었고, 경주석재인 빗돌은 까만 대리석이며 좌대석과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기허[驥虛]대사의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표충사[表忠祠]에 대한 내력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글씨는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쓰고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하였다. 표충비가 유명해진 이유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비신에서 땀이 흘렀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마치 구슬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이곳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한다. 그래서 ‘땀 흘리는 표충비’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밀양 얼음골과 만어산어산불영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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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남천강 옆 아동산에 위치한 영남루는 국보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동서 5간, 남북 4간의 팔작지붕에다 좌우로 2개의 딸린 누각을 거느린 이 거대한 2층 누각은 신라의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건물인 소루였으나, 영남사가 폐사되고 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그전부터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8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운 것이다. 부속건물로 능파각, 침류각, 사주문, 일주문, 천진궁이 있으며 영남루 누각에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당대 명필가들의 작품들이 편액으로 즐비하게 남아 있고 뜰에 깔린 석화 또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영남루의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 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 중에 하나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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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674m인 만어산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대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해 주는 전통사찰로 많은 전설과 갖가지 신비한 현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영험이 있었다고 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왕의 공불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 명종 10년(1180)에 처음 건립하였고,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만어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있으며, 양산지역 옥지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악귀가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다.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소리를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고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만어사 앞에 있는 돌을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하며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밀양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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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거리
5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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