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구길을 걷다
소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 이바구길은 그 무수한 이야기들의 보물창고다. 특히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인 백제병원, 최초의 창고인 남선창고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넓은 바다의 품처럼 넉넉하게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항구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는 일제 수탈의 시기와 6.25 동란을 겪었고, 힘든 피난살이를 산복도로에 판잣집을 짓고 서로 의지하며 버티어 나간다. 그리고 항구는 그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었다. 아찔한 168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그렇게 현재를 만들어왔다. 소금기 배인 진한 인생의 향기가 가득한 소시민들의 삶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이바구길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아보자. 출처:부산관광공사
코스 지도
부산 구 백제병원은 1927년 최용해가 개업한 부산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으로 그때 당시 상당한 규모의 병원으로 부산 부립병원 및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의 3대 병원으로 명성을 얻었다. 폐원 이후 1933년 봉래각이라는 고급 중화요리점으로 바뀌었고, 이후 부산에 주둔한 아카츠키 부대의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1945년 해방 이후 부산 치안대 사령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50년에는 임시 영사관 및 대사관으로 사용되다 개인이 매입하여 1953년 예식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5층을 철거한 뒤 카페 및 일반 상가들이 입주하였다.
남선창고터는 1900년 함경도에서 배로 물건을 싣고 와서 보관하던 최초의 물류 창고로, 초기에는 북선창고라 불리었으며 경부선을 통해 서울까지 물류를 운반하기 전에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후 경원선이 생기면서 윗지방에 북선창고가 만들어지자 이름을 남선창고로 변경하였다. 부산 최초의 근대적 물류창고인 남선창고는 1900년 초량객주 정치국이 초량동에 세웠다. 냉동고가 없던 시절에 바닥에 수로를 만들어 물기를 제거하고 서늘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옆 옛 백제병원과는 달리 2009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붉은 벽돌로 쌓은 담장만 남아있다. 해방 전까지는 주로 명태창고로 활용되어 일명 명태고방으로도 불렸다. 이후 부산산업경제 변화의 흐름을 타고 화공약품, 합판, 신발,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의 짐, 가전제품 등을 위탁 보관하는 일반창고의 역할을 해 왔다.
초량교회는 1892년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설립한 부산 최초의 교회이며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 처음에는 선교사 기지 내의 영선현교회로 시작했는데, 교세가 늘어나자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앞에 있던 동사무소를 빌려 교육관으로 사용하다가 1912년 이곳을 매입해 교회로 바꿨다. 이후 영주동교회, 초량 3·1 교회를 거쳐 초량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초량교회는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기도처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현재는 초량교회 역사관을 운영하며 교회가 보관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들과 함께 힘들었던 시대에 초량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전시하고 있다.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산복도로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인 세로로 난 지상 6층 높이의 아찔한 계단이다. 계단의 수가 168개이며 계단 아래에 원래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식수로 쓰던 1개의 우물만 남아있으며 물이 부족하던 시절 물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지게, 물항아리 등 남녀노소 누구나 만나는 만남의 장이었으며 소문이 퍼지는 근원지였다고 전해진다.
168계단의 중간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의 한쪽 벽에는 고교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가곡이자 김민부가 가사를 쓴 〈기다리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 산복도로 조망 9경이라고 할 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다. 부산이 낳은 천재 시인 김민부는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병석으로 그는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재학 시절 두 차례 월반했고, 중학교 입학시험에선 부산 최고 점수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 부산중학교 재학시절 김민부로 개명했다. 김민부는 부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로 입선하고, 그해 4월 부산대와 부산일보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전국학생문예작품 콩쿠르에서 ‘딸기밭에서’라는 시로 특선을 차지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첫 번째 시집 ‘항아리’를 발표했고, 3학년 때는 시조 ‘균열’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등 특출 난 문학적 재능을 자랑했다. 1960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국문과에 편입해 졸업한 후, 1962년 부산문화방송국에 입사해 라디오 프로그램 ‘자갈치아지매’를 기획, 집필한다. ‘자갈치아지매’는 아직도 방송되고 있으며, 해당 방송사의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1965년에는 서울로 무대를 옮겨 MBC, DBC, TBC 등에서 방송작가로 두각을 나타낸다. 1970년엔 오페라 ‘자갈치아지매’의 극본을 써서 김자경오페라단이 이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통신앙으로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는 곳이다. 당제는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의례이며, 매년 음력 3월과 9월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매사에 근신하며 제사일이 다가오면 당산나무 주변을 청결히 한 뒤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몇 줌 놓아 부정을 막는다. 김민부 전망대에서 100m, 도보 약 3분의 거리에 있다.
이바구공작소는 부산 산복도로의 생활자료관으로, 산복도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1층에서는 전시되어 있는 레트로한 교복을 대여해 체험해 볼 수 있고 2층에는 넓은 창으로 ‘산복도로의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산복도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로 꾸며진 공간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오르막의 산까지 판자촌 마을이 형성되어 ‘산복도로’가 탄생한 이야기부터, 생계를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사진과 자료로 알 수 있다. (출처 : 부산광역시 교육청 홈페이지)
코스 구성
부산 구 백제병원은 1927년 최용해가 개업한 부산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으로 그때 당시 상당한 규모의 병원으로 부산 부립병원 및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의 3대 병원으로 명성을 얻었다. 폐원 이후 1933년 봉래각이라는 고급 중화요리점으로 바뀌었고, 이후 부산에 주둔한 아카츠키 부대의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1945년 해방 이후 부산 치안대 사령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50년에는 임시 영사관 및 대사관으로 사용되다 개인이 매입하여 1953년 예식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5층을 철거한 뒤 카페 및 일반 상가들이 입주하였다.
남선창고터는 1900년 함경도에서 배로 물건을 싣고 와서 보관하던 최초의 물류 창고로, 초기에는 북선창고라 불리었으며 경부선을 통해 서울까지 물류를 운반하기 전에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후 경원선이 생기면서 윗지방에 북선창고가 만들어지자 이름을 남선창고로 변경하였다. 부산 최초의 근대적 물류창고인 남선창고는 1900년 초량객주 정치국이 초량동에 세웠다. 냉동고가 없던 시절에 바닥에 수로를 만들어 물기를 제거하고 서늘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옆 옛 백제병원과는 달리 2009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붉은 벽돌로 쌓은 담장만 남아있다. 해방 전까지는 주로 명태창고로 활용되어 일명 명태고방으로도 불렸다. 이후 부산산업경제 변화의 흐름을 타고 화공약품, 합판, 신발,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의 짐, 가전제품 등을 위탁 보관하는 일반창고의 역할을 해 왔다.
초량교회는 1892년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설립한 부산 최초의 교회이며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 처음에는 선교사 기지 내의 영선현교회로 시작했는데, 교세가 늘어나자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앞에 있던 동사무소를 빌려 교육관으로 사용하다가 1912년 이곳을 매입해 교회로 바꿨다. 이후 영주동교회, 초량 3·1 교회를 거쳐 초량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초량교회는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기도처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현재는 초량교회 역사관을 운영하며 교회가 보관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들과 함께 힘들었던 시대에 초량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전시하고 있다.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산복도로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인 세로로 난 지상 6층 높이의 아찔한 계단이다. 계단의 수가 168개이며 계단 아래에 원래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식수로 쓰던 1개의 우물만 남아있으며 물이 부족하던 시절 물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물지게, 물항아리 등 남녀노소 누구나 만나는 만남의 장이었으며 소문이 퍼지는 근원지였다고 전해진다.
168계단의 중간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의 한쪽 벽에는 고교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가곡이자 김민부가 가사를 쓴 〈기다리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 산복도로 조망 9경이라고 할 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다. 부산이 낳은 천재 시인 김민부는 동구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병석으로 그는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재학 시절 두 차례 월반했고, 중학교 입학시험에선 부산 최고 점수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 부산중학교 재학시절 김민부로 개명했다. 김민부는 부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로 입선하고, 그해 4월 부산대와 부산일보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전국학생문예작품 콩쿠르에서 ‘딸기밭에서’라는 시로 특선을 차지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첫 번째 시집 ‘항아리’를 발표했고, 3학년 때는 시조 ‘균열’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등 특출 난 문학적 재능을 자랑했다. 1960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국문과에 편입해 졸업한 후, 1962년 부산문화방송국에 입사해 라디오 프로그램 ‘자갈치아지매’를 기획, 집필한다. ‘자갈치아지매’는 아직도 방송되고 있으며, 해당 방송사의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1965년에는 서울로 무대를 옮겨 MBC, DBC, TBC 등에서 방송작가로 두각을 나타낸다. 1970년엔 오페라 ‘자갈치아지매’의 극본을 써서 김자경오페라단이 이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통신앙으로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는 곳이다. 당제는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의례이며, 매년 음력 3월과 9월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매사에 근신하며 제사일이 다가오면 당산나무 주변을 청결히 한 뒤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몇 줌 놓아 부정을 막는다. 김민부 전망대에서 100m, 도보 약 3분의 거리에 있다.
이바구공작소는 부산 산복도로의 생활자료관으로, 산복도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1층에서는 전시되어 있는 레트로한 교복을 대여해 체험해 볼 수 있고 2층에는 넓은 창으로 ‘산복도로의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산복도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로 꾸며진 공간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오르막의 산까지 판자촌 마을이 형성되어 ‘산복도로’가 탄생한 이야기부터, 생계를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사진과 자료로 알 수 있다. (출처 : 부산광역시 교육청 홈페이지)
- 소요시간
- 5시간
- 코스거리
- 2.37km
- 테마
- 자유여행
후기
- 소요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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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거리
- 2.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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