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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코스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

소개

서울을 상진이라 할 수 있는 숭례문과 주변의 관광명소들을 걷는 코스다. 1891년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주변에 약초밭이 있어서 약현이라 불리게 되었단다. 무엇보다 어느 계절에 걸어도 아름다운 정동길과 덕수궁 걷는 길은 아직도 예전의 운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출처: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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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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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숭례문
숭례문

숭례문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서울의 상징이자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사대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현판 글씨가 세로로 쓰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성종 10년(1479)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피해를 당하지 않고 오랜 세월 한성의 대문 역할을 해왔다.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령으로 전투의 장소가 되었으며 같은 해 일본 황태자 방한 당시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는 핑계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이 헐린 비극의 역사도 있다. 2006년 연결된 성곽 없이 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을 2006년 복원 공사해 원래의 모습을 재현했다.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인해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타고 2층 문루가 소실됐다.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거쳐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숭례문 편액을 썼다고 한다.

2 서울 약현성당
서울 약현성당

약현(藥峴) 성당은 소규모 성당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886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명동 성당 아래 공소(公所)로 설립되었다. 1891년 당시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두세 신부가 합동 (蛤洞)에 대지를 마련하고, 부주교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시공감독을 맡아 그 다음해인 1892년에 약현 성당이 탄생하였다.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예전에 약초를 재배했던 지역으로 ‘약초 밭이 있는 고개’ 라는 뜻의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에 줄여서 ‘약현’이라고 했는데, 서울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사용되어 약현성당이란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이 성당은 우리 나라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주목된다. 또한 고딕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반원형의 둔중한 아치 형태 지붕과 창의 면적을 좁게 나타내는 등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는 벽돌조 건물이다. 비교적 소규모의 성당으로 옆면 창은 처마 높이가 낮아 뾰족아치가 아닌 원형아치로 되어 있으나, 앞면의 출입구와 옆면 좌우로 돌출한 출입구 창 부분이 각기 뾰족아치를 이루어 고딕 모양을 하고 있다.

3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역사공원

서소문역사공원은 사계절 내내 다양한 종류의 수목을 자랑하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다. 서소문역사공원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원래는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지’로 구한말 서소문 전투의 군인 등 사회개혁 세력들뿐만 아니라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까지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된 천주교인 중 44명이 성인이 되어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로도 자리 잡았다. 서소문역사공원 지상에는 역사공원과 시민 편의시설, 지하엔 기념전당, 하늘광장, 역사기념관, 교육 및 편의시설,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1984년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은 그대로 보존한 채 광장을 공원 중심부에 놓고 녹지와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며, 소나무, 대왕참나무, 장미 등 수목(45종) 7100주와 창포, 핑크 뮬리, 억새 등 초화류(33종) 10만 본을 심어 힐링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지하 1층은 도서실, 세미나실, 기념품 매장과 카페, 운영사무실 등 방문자를 위한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지하 2층~3층은 기념전당인 하늘광장과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로 구성된 역사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늘광장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추념의 의미를 지닌 곳으로 지하에 있어도 천장을 텄기 때문에 명칭 그대로 하늘을 볼 수 있다. 서소문역사공원은 박물관의 하늘광장 등 주요 지점이 지상과 연결되어 존재함으로써 지하 문화 공간의 역사적 당위성과 무게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4 덕수궁
덕수궁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 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5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重眀殿)의 ‘중명’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라는 뜻으로,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후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불렸다.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고종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편전 겸 접견소로 이용하였다. 수옥헌이 중명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06년 이후로 보여진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서 활용하다가, 2009년에 복원공사하여 2010년에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코스 구성

1

숭례문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서울의 상징이자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사대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현판 글씨가 세로로 쓰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성종 10년(1479)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피해를 당하지 않고 오랜 세월 한성의 대문 역할을 해왔다.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령으로 전투의 장소가 되었으며 같은 해 일본 황태자 방한 당시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는 핑계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이 헐린 비극의 역사도 있다. 2006년 연결된 성곽 없이 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을 2006년 복원 공사해 원래의 모습을 재현했다.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인해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타고 2층 문루가 소실됐다.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거쳐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숭례문 편액을 썼다고 한다.

2

약현(藥峴) 성당은 소규모 성당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886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명동 성당 아래 공소(公所)로 설립되었다. 1891년 당시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두세 신부가 합동 (蛤洞)에 대지를 마련하고, 부주교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시공감독을 맡아 그 다음해인 1892년에 약현 성당이 탄생하였다.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예전에 약초를 재배했던 지역으로 ‘약초 밭이 있는 고개’ 라는 뜻의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에 줄여서 ‘약현’이라고 했는데, 서울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사용되어 약현성당이란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이 성당은 우리 나라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주목된다. 또한 고딕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반원형의 둔중한 아치 형태 지붕과 창의 면적을 좁게 나타내는 등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는 벽돌조 건물이다. 비교적 소규모의 성당으로 옆면 창은 처마 높이가 낮아 뾰족아치가 아닌 원형아치로 되어 있으나, 앞면의 출입구와 옆면 좌우로 돌출한 출입구 창 부분이 각기 뾰족아치를 이루어 고딕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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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역사공원은 사계절 내내 다양한 종류의 수목을 자랑하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다. 서소문역사공원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원래는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지’로 구한말 서소문 전투의 군인 등 사회개혁 세력들뿐만 아니라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까지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된 천주교인 중 44명이 성인이 되어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로도 자리 잡았다. 서소문역사공원 지상에는 역사공원과 시민 편의시설, 지하엔 기념전당, 하늘광장, 역사기념관, 교육 및 편의시설,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1984년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은 그대로 보존한 채 광장을 공원 중심부에 놓고 녹지와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며, 소나무, 대왕참나무, 장미 등 수목(45종) 7100주와 창포, 핑크 뮬리, 억새 등 초화류(33종) 10만 본을 심어 힐링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지하 1층은 도서실, 세미나실, 기념품 매장과 카페, 운영사무실 등 방문자를 위한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지하 2층~3층은 기념전당인 하늘광장과 상설전시실 및 기획전시실로 구성된 역사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늘광장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추념의 의미를 지닌 곳으로 지하에 있어도 천장을 텄기 때문에 명칭 그대로 하늘을 볼 수 있다. 서소문역사공원은 박물관의 하늘광장 등 주요 지점이 지상과 연결되어 존재함으로써 지하 문화 공간의 역사적 당위성과 무게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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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 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5

중명전(重眀殿)의 ‘중명’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라는 뜻으로,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후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불렸다.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고종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편전 겸 접견소로 이용하였다. 수옥헌이 중명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06년 이후로 보여진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민간에서 활용하다가, 2009년에 복원공사하여 2010년에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코스일정
기타
소요시간
3시간
코스거리
8.03km
테마
자유여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