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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근대까지, 익산이 품은 이야기를 만나다

소개

익산은 고대부터 삼국시대, 근대의 역사까지 함께 품고 있는 보석과도 같은 고장이다. 많은 비밀을 간직한 미륵사지와 백제 무왕의 전설을 담은 서동공원, 국보인 왕궁리5층석탑과 유물전시관을 둘러본다. 잉옥수리조합사무실과 춘포역사, 구 일본인 농장가옥 등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의 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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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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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산 미륵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미륵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 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를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 탑 3 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 탑 3 금당식 가람배치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 미륵사지의 또 다른 유물,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 미륵사지에는 두 가지의 유물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그 하나는 미륵사지 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사지 당간지주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로, 높이 395㎝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2 서동공원
서동공원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서동공원은 금마관광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1990년부터 조성하여 2004년 금마조각공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한 공원이다. 한반도를 빼닮은 금마저수지를 안고 있으며, 저수지를 따라 4만 평 부지에 조각공원과 전망대 등이 있다. 공원 곳곳에는 서동과 선화를 테마로 하는 조각, 십이지신상, 기타 조각 작품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물높이가 최대 5m까지 올라가는 분수대와 잔디광장, 미륵광장, 수변광장, 야외무대 등을 갖추고 있어 지역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동공원에서는 매년 5월 초 서동설화와 서동요를 테마로 한 익산서동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3 익산 쌍릉
익산 쌍릉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7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이들 두 고분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된 바 있으나, 정확한 정보를 남기지 않아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발굴조사가 2018년(대왕릉)과 2019년(소왕릉)에 실시되었다. 학술발굴조사 결과, 대왕릉의 경우는 사비기 백제왕릉급 무덤으로서 판축 기법을 사용한 봉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석실 끝부분에서는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발견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밀분석 결과 인골추정 나이가 무왕의 사망 나이와 비슷함에 따라 무왕의 무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소왕릉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자료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무왕릉과 마찬가지로 석실의 규모와 품격에 있어 왕릉급임을 확인하였다.

4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한 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5 익산 왕궁리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왕궁리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600 ~ 641)대에 조성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했다.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6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및 창고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및 창고
7 익산 춘포역사
익산 춘포역사

익산 춘포역사는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덕실리에 있는 역사 건물이다. 이곳은 2005년 11월 11일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철도공사 소유이다. 익산 춘포역사는 1914년에 지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 건물이다. 춘포역은 처음에는 대장역(大場驛)이라는 이름으로 익산(당시 이리)과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의 보통역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이 근처에 일본인 농장이 설립되면서 형성된 ‘대장촌’이라는 일본인 이민촌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했던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대장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일제강점기로, 일본사람들이 들이 넓다고 큰 대(大), 마당 장(場)자를 써서 대장촌이라고 했다. 이후 1996년에 춘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7년에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어 지금까지 삼례역에서 관리하고 있다. 광장 쪽 출입구 위에는 캐노피, 철로변에는 직교형 박공지붕이 돌출되는 등 군산 임피역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전형적인 소규모 철도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있다. 철로 위의 추억을 간직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춘포역사 전라선에 있는 한적한 마을의 춘포역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철도의 기능이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철도역사이다. 춘포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으로 실어 나르고, 농사를 짓기 위한 물자가 역을 통해 들어왔다. 화려했던 과거였지만 지금은 역의 기능이 사라져 버렸다.

8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1940년대에 농장 안에 지은 2층 건물로 건축면적 106.78㎡, 연면적 139.83㎡로 나무판자를 잇대어 지은 건물이다. 1층은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ㄱ자형의 복도를 따라 방들을 배열하였고 2층에는 외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발코니가 돌출되어 있어 독특한 외관을 이루고 있다. 건물 지붕은 팔작지붕 위에 일식기와를 올렸으며 외벽은 비늘벽으로 처리하였다. 1층 내부는 다다미방이 온돌로 바뀌고 칸막이벽을 없애는 등 대부분 개조되어 있다. 그러나 2층은 넓은 방에 다다미가 깔려 있고 반침과 도코노마가 그대로 남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코스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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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 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를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 탑 3 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 탑 3 금당식 가람배치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 미륵사지의 또 다른 유물,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 미륵사지에는 두 가지의 유물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그 하나는 미륵사지 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사지 당간지주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로, 높이 395㎝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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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서동공원은 금마관광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1990년부터 조성하여 2004년 금마조각공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한 공원이다. 한반도를 빼닮은 금마저수지를 안고 있으며, 저수지를 따라 4만 평 부지에 조각공원과 전망대 등이 있다. 공원 곳곳에는 서동과 선화를 테마로 하는 조각, 십이지신상, 기타 조각 작품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물높이가 최대 5m까지 올라가는 분수대와 잔디광장, 미륵광장, 수변광장, 야외무대 등을 갖추고 있어 지역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동공원에서는 매년 5월 초 서동설화와 서동요를 테마로 한 익산서동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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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7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이들 두 고분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된 바 있으나, 정확한 정보를 남기지 않아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발굴조사가 2018년(대왕릉)과 2019년(소왕릉)에 실시되었다. 학술발굴조사 결과, 대왕릉의 경우는 사비기 백제왕릉급 무덤으로서 판축 기법을 사용한 봉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석실 끝부분에서는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발견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밀분석 결과 인골추정 나이가 무왕의 사망 나이와 비슷함에 따라 무왕의 무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소왕릉의 경우에는 적극적인 자료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무왕릉과 마찬가지로 석실의 규모와 품격에 있어 왕릉급임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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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한 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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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600 ~ 641)대에 조성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했다.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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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춘포역사는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덕실리에 있는 역사 건물이다. 이곳은 2005년 11월 11일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철도공사 소유이다. 익산 춘포역사는 1914년에 지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 건물이다. 춘포역은 처음에는 대장역(大場驛)이라는 이름으로 익산(당시 이리)과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의 보통역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이 근처에 일본인 농장이 설립되면서 형성된 ‘대장촌’이라는 일본인 이민촌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했던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대장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일제강점기로, 일본사람들이 들이 넓다고 큰 대(大), 마당 장(場)자를 써서 대장촌이라고 했다. 이후 1996년에 춘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7년에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어 지금까지 삼례역에서 관리하고 있다. 광장 쪽 출입구 위에는 캐노피, 철로변에는 직교형 박공지붕이 돌출되는 등 군산 임피역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전형적인 소규모 철도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있다. 철로 위의 추억을 간직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춘포역사 전라선에 있는 한적한 마을의 춘포역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철도의 기능이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철도역사이다. 춘포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으로 실어 나르고, 농사를 짓기 위한 물자가 역을 통해 들어왔다. 화려했던 과거였지만 지금은 역의 기능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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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은 1940년대에 농장 안에 지은 2층 건물로 건축면적 106.78㎡, 연면적 139.83㎡로 나무판자를 잇대어 지은 건물이다. 1층은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ㄱ자형의 복도를 따라 방들을 배열하였고 2층에는 외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발코니가 돌출되어 있어 독특한 외관을 이루고 있다. 건물 지붕은 팔작지붕 위에 일식기와를 올렸으며 외벽은 비늘벽으로 처리하였다. 1층 내부는 다다미방이 온돌로 바뀌고 칸막이벽을 없애는 등 대부분 개조되어 있다. 그러나 2층은 넓은 방에 다다미가 깔려 있고 반침과 도코노마가 그대로 남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코스일정
기타
소요시간
7시간
코스거리
약 40km
테마
자유여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