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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코스

백두대간 마구령과 고치령에서 즐기는 캠핑여행

소개

풍기에서 부석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늘 백두대간이 함께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경북의 고택을 한데 모아놓은 선비촌, 무량수전 등 값진 문화유산과 함께 석양이 아름다운 천년고찰 부석사까지 만난다. 성혈사의 아름다운 창살이 있는 나한전, 마구령과 고치령을 넘나들며 즐기는 캠핑까지 백두대간 소백산 자락을 즐길 수 있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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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547-16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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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주 순흥 벽화 고분
영주 순흥 벽화 고분

1985년 1월 문화재관리국과 대구대학교가 함께 발굴 조사한 이 벽화 고분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고분의 현실(玄室) 남쪽 벽에 쓰인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이란 글씨를 통하여 대략 539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石室墳)으로서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棺臺)가 비교적 높게 마련되어 있으며,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현실의 크기는 동서 약 3.5m, 남북 약 2m로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약간씩 각을 줄이고 천장은 두 장의 판판하고 큰 돌을 올려 완성하였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벽면과 관대의 측면까지 채색화(彩色畵)를 그렸고, 특히, 연도의 좌우 벽에 힘이 센 장사상(壯士像)을 그렸다. 특히, 연도 서쪽벽의 뱀을 손에 감고 있는 장사상은 이 무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고분은 벽화나 구조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고대신라의 고분벽화로 추정되며, 이 고분에 있는 벽화를 통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 내세관, 그리고 고구려와의 문화교섭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 지역에 침투했음을 잘 알려주는 유적으로, 현재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2 성혈사(영주)
성혈사(영주)

통일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했다고 추정되는 성혈사는 소백산 국망봉 아래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성혈사의 명칭인 성혈은 사찰 남쪽에 있는 굴의 이름인데, 옛날 이곳 바위 굴에서 성승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혈사의 가람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좁은 계곡의 일부를 지형에 따라 절터로 조성하고 여기에 승방과 나한전을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삼성각, 심검당, 함담정·누각, 요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나한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근래에 들어 신축하였으며, 당호와 현판도 없는 건물이 여러 채 있다. 성혈사는 개창 이후 기록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내 중요 문화재로는 성혈사 나한전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신중탱화가 있다.

3 영주 소수서원
영주 소수서원

1542년(중종 37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 것이 시초이다. 이듬해인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해 유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불렸다. 1550년(명종 5)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1544년(중종 39)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 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 지냈다. 서원 내 건물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서원의 정형화된 배치 형식이 확립되기 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초기 서원이기 때문이다.

4 선비촌
선비촌

영주 선비촌은 한국 유교 문화 발상지인 영주 순흥 소수서원과 바로 접하여 위치한 곳으로 선현들의 학문 탐구의 장소 및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한 곳이다. 또한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역사관 확립을 도모하고자 설립된 체험 교육장이다. 우리 민족의 생활 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 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병폐 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으로 재현하게 된 곳이다. 또한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살아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각종 기획프로그램 (오감체험형 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 등)을 통해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체험함으로써 잊혀가는 수준 높은 선비문화의 숨결을 느껴보실 수 있다.

5 마구령·고치령
마구령·고치령

마구령과 고치령은 소백산의 대표적인 고갯길로, 백두대간에서 소백산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다. 두 고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길로, 보부상들의 애환도 함께 안고 있는 영남 지방의 옛길이다. 마구령은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 지역 가장 동쪽에 자리한 고개로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암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장사꾼들이 말을 타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전해지며, 경사가 심하여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린다. 충청북도 단양군의 의풍계곡에서 백성들이 부석장에 나가기 위해 마구령을 넘어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고치령은 영주시 단산면의 마락리와 좌석리를 잇는 고개로, 과거에는 북쪽의 관동 및 호서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신라시대에 고개 아래에 대궐을 짓기 위해 터를 잡은 일이 있는데, 이때에는 옛고개라 하였던 것이 변형되어 지금은 [고치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소백산 산지와 태백산 산지가 만나는 고개로 고개의 서쪽으로 형제봉과 국망봉, 비로봉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이 이어진다.

6 부석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석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 돌이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렸다. 1916년 해체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 석조여래좌상, 삼층석탑, 당간지주, 석조 기단 등이 있고, 고려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고려 각판,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 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 소상(塑像)이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코스 구성

1

1985년 1월 문화재관리국과 대구대학교가 함께 발굴 조사한 이 벽화 고분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고분의 현실(玄室) 남쪽 벽에 쓰인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이란 글씨를 통하여 대략 539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石室墳)으로서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棺臺)가 비교적 높게 마련되어 있으며,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현실의 크기는 동서 약 3.5m, 남북 약 2m로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약간씩 각을 줄이고 천장은 두 장의 판판하고 큰 돌을 올려 완성하였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벽면과 관대의 측면까지 채색화(彩色畵)를 그렸고, 특히, 연도의 좌우 벽에 힘이 센 장사상(壯士像)을 그렸다. 특히, 연도 서쪽벽의 뱀을 손에 감고 있는 장사상은 이 무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고분은 벽화나 구조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고대신라의 고분벽화로 추정되며, 이 고분에 있는 벽화를 통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 내세관, 그리고 고구려와의 문화교섭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5세기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 지역에 침투했음을 잘 알려주는 유적으로, 현재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2

통일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했다고 추정되는 성혈사는 소백산 국망봉 아래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성혈사의 명칭인 성혈은 사찰 남쪽에 있는 굴의 이름인데, 옛날 이곳 바위 굴에서 성승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혈사의 가람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좁은 계곡의 일부를 지형에 따라 절터로 조성하고 여기에 승방과 나한전을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삼성각, 심검당, 함담정·누각, 요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나한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근래에 들어 신축하였으며, 당호와 현판도 없는 건물이 여러 채 있다. 성혈사는 개창 이후 기록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내 중요 문화재로는 성혈사 나한전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신중탱화가 있다.

3

1542년(중종 37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 것이 시초이다. 이듬해인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해 유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불렸다. 1550년(명종 5)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1544년(중종 39)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 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 지냈다. 서원 내 건물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서원의 정형화된 배치 형식이 확립되기 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초기 서원이기 때문이다.

4

영주 선비촌은 한국 유교 문화 발상지인 영주 순흥 소수서원과 바로 접하여 위치한 곳으로 선현들의 학문 탐구의 장소 및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한 곳이다. 또한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역사관 확립을 도모하고자 설립된 체험 교육장이다. 우리 민족의 생활 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 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병폐 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으로 재현하게 된 곳이다. 또한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살아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각종 기획프로그램 (오감체험형 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 등)을 통해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체험함으로써 잊혀가는 수준 높은 선비문화의 숨결을 느껴보실 수 있다.

5

마구령과 고치령은 소백산의 대표적인 고갯길로, 백두대간에서 소백산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다. 두 고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길로, 보부상들의 애환도 함께 안고 있는 영남 지방의 옛길이다. 마구령은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 지역 가장 동쪽에 자리한 고개로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암곡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장사꾼들이 말을 타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전해지며, 경사가 심하여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린다. 충청북도 단양군의 의풍계곡에서 백성들이 부석장에 나가기 위해 마구령을 넘어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고치령은 영주시 단산면의 마락리와 좌석리를 잇는 고개로, 과거에는 북쪽의 관동 및 호서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신라시대에 고개 아래에 대궐을 짓기 위해 터를 잡은 일이 있는데, 이때에는 옛고개라 하였던 것이 변형되어 지금은 [고치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소백산 산지와 태백산 산지가 만나는 고개로 고개의 서쪽으로 형제봉과 국망봉, 비로봉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이 이어진다.

6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 돌이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렸다. 1916년 해체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 석조여래좌상, 삼층석탑, 당간지주, 석조 기단 등이 있고, 고려 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고려 각판,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 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 소상(塑像)이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코스일정
기타
소요시간
1박 2일
코스거리
74.2km
테마
자유여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