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사당에서 듣는 백제 이야기
소개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인 공주는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60여 년간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고도이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왕릉으로 천년 넘는 세월 동안 고스란히 묻혀 있던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웅진이란 지명이 유래한 곰나루는 곰사당과 함께 노송이 우거져 강변을 따라 산책하기 좋다.
코스 지도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렀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국의 위풍당당함을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으로 볼 수 있고,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밤풍경이 아름다운 공산성 감상이 가능하다. (출처 : 공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사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 웅진시기(475~538년)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금강의 남쪽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호분과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 강점기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1~5호분은 백제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이다. 벽돌무덤은 백제에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양식의 무덤으로, 이는 백제가 중국 남조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국제적 문화교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펼쳐진 낮은 언덕과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지역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명승지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로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썼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던 교통로였고, 나당연합군의 장군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써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또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 터가 남아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서민들의 생활터이자 물길로서 민중의 애환이 짙게 서려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데, 고마나루 북쪽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 주의 솔밭이 금강과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다. (출처 : 국가유산청)
코스 구성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렀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국의 위풍당당함을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으로 볼 수 있고,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밤풍경이 아름다운 공산성 감상이 가능하다. (출처 : 공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사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 웅진시기(475~538년)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금강의 남쪽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호분과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 강점기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1~5호분은 백제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이다. 벽돌무덤은 백제에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양식의 무덤으로, 이는 백제가 중국 남조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국제적 문화교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펼쳐진 낮은 언덕과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지역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명승지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로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썼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던 교통로였고, 나당연합군의 장군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써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또한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熊津壇) 터가 남아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서민들의 생활터이자 물길로서 민중의 애환이 짙게 서려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데, 고마나루 북쪽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 주의 솔밭이 금강과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다. (출처 : 국가유산청)
- 소요시간
- 4시간
- 코스거리
- 3km
- 테마
- 자유여행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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