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정신을 느껴보는 서울 여행
소개
대한 독립 만세! 3.1운동과 관련된 의미있는 역사 속 현장을 따라 걸으며, 서울을 색다르게 여행해보자. 3.1운동 당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그 뜻깊은 장소에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되새겨보며 독립의 정신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을 갖자.
코스 지도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시공하여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기 위해 대교당 건축이란 명분을 앞세워 1918년 4월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천도교가 3·1운동의 중심단체로 활동하면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공사가 늦어졌다. 이곳에서는 천도교의 종교의식 외에 각종 정치집회, 예술공연, 강연회 등 일반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은 비교적 높고 웅장하여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서울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 3·1운동 전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이 건물은 천도교의 보국안민 기치를 상징하게 되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화강석을 섞어 써 색과 재질감의 조화가 뛰어나다. 한국의 근대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젯세션(Secession, 분리파) 양식의 건축이다. 이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독일인 건축가 안톤 페러를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독일의 건축사조를 접한 데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1층과 2층의 날개 부분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의 몸체는 내부기둥이 없는 강당 형식의 대집회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히 큰 폭의 공간을 덮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구조적 해결방법이 적용된 것이다.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 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내에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댕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1894~1928)을 비롯한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를 열었던 곳이다. 2월 28일에 열린 제4회 회의에서는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다음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22년에는 이 교회에서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가 설립되어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코스 구성
천도교의 중앙교당으로 종교의식과 일반행사를 하는 곳이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주관으로 1918년에 시공하여 1921년에 완공되었다. 교인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하였는데, 공사비에서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기 위해 대교당 건축이란 명분을 앞세워 1918년 4월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천도교가 3·1운동의 중심단체로 활동하면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공사가 늦어졌다. 이곳에서는 천도교의 종교의식 외에 각종 정치집회, 예술공연, 강연회 등 일반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은 비교적 높고 웅장하여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서울시내 3대 건물로 꼽혔다. 3·1운동 전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이 건물은 천도교의 보국안민 기치를 상징하게 되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화강석을 섞어 써 색과 재질감의 조화가 뛰어나다. 한국의 근대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젯세션(Secession, 분리파) 양식의 건축이다. 이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독일인 건축가 안톤 페러를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독일의 건축사조를 접한 데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1층과 2층의 날개 부분에는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의 몸체는 내부기둥이 없는 강당 형식의 대집회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히 큰 폭의 공간을 덮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구조적 해결방법이 적용된 것이다.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 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내에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댕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1894~1928)을 비롯한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를 열었던 곳이다. 2월 28일에 열린 제4회 회의에서는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다음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22년에는 이 교회에서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가 설립되어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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