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유적 따라 가을 속으로
소개
융건릉을 빠져 나오면 1.7km지점에 숲으로 둘러싸인 용주사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태안읍 송산리지만 융건릉을 모신 화산 뒤쪽인 동쪽기슭이다.
코스 지도
용주사는 정조가 창건한 사찰이다. 본래 이곳은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길양사를 창건하여 고려 초기에 수륙재가 봉행되었으나 잦은 병란으로 소실된 후 폐사되었었다. 그 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원찰을 건립한 곳으로 낙성식 날 밤 정조가 꿈을 꾸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용주사의 주요 문화유산으로는 용주사 범종(국보), 회양나무(천연기념물), 금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청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상량문(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전적수사본(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병풍(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대웅전후불탱화(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불설부모은중경판(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 있다.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비롯된 만큼 사도세자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여 중창된 사찰로서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 중에서도 효사상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러한 효사상을 받들고자 만들어진 [용주사 효행박물관]의 친절한 안내와 상세한 해설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남기 유물에서 삶에 있어 필요한 지혜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융릉은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능이다. 융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1762년(영조 38)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묘를 조성하였고, 이후 무덤을 수은묘(垂恩墓)라 불렀다. 1776년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존호(尊號)를 올렸고,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는 장헌세자가 왕세자의 신분도 있었지만, 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무덤의 이름을 원으로 정한 것이다. 이후 정조는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1789년(정조 13) 수원 화산인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15년(순조 15) 헌경황후(혜경궁)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현륭원에 합장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원을 능으로 높여 융릉이라 하였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능이다. 건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건릉은 1800년(정조 24)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장조의 융릉(당시 사도세자의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21년(순조 21)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건릉을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능 자리는 융릉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정하고 정조를 먼저 모신 다음에 효의황후를 합장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안곡서원은 현종 7년(1666년)에 남양 현감으로 부임한 민시중이 지방유림의 의견에 따라 기묘사화로 귀양을 간 박세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안곡사가 있던 곳이다. 이후 현종 9년(1668년)에 박세희의 큰형으로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효행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던 박세훈을 사당에 모셨으며, 1697년에는 영의정을 지낸 홍섬을 추가로 모셨다. 안곡사는 경종1년(1721년) [안곡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으며 서원이 되었다가 고종8년(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남양지역 유림들이 1976년에 다시 지었다. 안곡서원의 건물은 홍살문, 강당, 내삼문, 사당로 구성된다. 강당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안곡서원중건기]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5칸으로 박세희를 주벽으로 양쪽으로 박세훈, 홍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원 밖 바로 앞에 현재 450년이 훌쩍 넘은 높이 32m의 은행나무가 서있는데, 이 나무는 안곡서원과 함께 고락을 함께 해왔다. 안곡서원은 1976년 사우가 중건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신면에 거주하는 상주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코스 구성
용주사는 정조가 창건한 사찰이다. 본래 이곳은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길양사를 창건하여 고려 초기에 수륙재가 봉행되었으나 잦은 병란으로 소실된 후 폐사되었었다. 그 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원찰을 건립한 곳으로 낙성식 날 밤 정조가 꿈을 꾸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용주사의 주요 문화유산으로는 용주사 범종(국보), 회양나무(천연기념물), 금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청동향로(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상량문(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전적수사본(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병풍(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대웅전후불탱화(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불설부모은중경판(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 있다.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비롯된 만큼 사도세자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여 중창된 사찰로서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 중에서도 효사상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러한 효사상을 받들고자 만들어진 [용주사 효행박물관]의 친절한 안내와 상세한 해설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남기 유물에서 삶에 있어 필요한 지혜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융릉은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헌경황후 홍씨의 능이다. 융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1762년(영조 38)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묘를 조성하였고, 이후 무덤을 수은묘(垂恩墓)라 불렀다. 1776년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존호(尊號)를 올렸고, 묘를 원으로 높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는 장헌세자가 왕세자의 신분도 있었지만, 왕의 생부이기 때문에 무덤의 이름을 원으로 정한 것이다. 이후 정조는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1789년(정조 13) 수원 화산인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1815년(순조 15) 헌경황후(혜경궁)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현륭원에 합장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장헌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자 원을 능으로 높여 융릉이라 하였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능이다. 건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건릉은 1800년(정조 24)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장조의 융릉(당시 사도세자의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러나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21년(순조 21)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건릉을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능 자리는 융릉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정하고 정조를 먼저 모신 다음에 효의황후를 합장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안곡서원은 현종 7년(1666년)에 남양 현감으로 부임한 민시중이 지방유림의 의견에 따라 기묘사화로 귀양을 간 박세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안곡사가 있던 곳이다. 이후 현종 9년(1668년)에 박세희의 큰형으로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효행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던 박세훈을 사당에 모셨으며, 1697년에는 영의정을 지낸 홍섬을 추가로 모셨다. 안곡사는 경종1년(1721년) [안곡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으며 서원이 되었다가 고종8년(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남양지역 유림들이 1976년에 다시 지었다. 안곡서원의 건물은 홍살문, 강당, 내삼문, 사당로 구성된다. 강당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안곡서원중건기]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5칸으로 박세희를 주벽으로 양쪽으로 박세훈, 홍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원 밖 바로 앞에 현재 450년이 훌쩍 넘은 높이 32m의 은행나무가 서있는데, 이 나무는 안곡서원과 함께 고락을 함께 해왔다. 안곡서원은 1976년 사우가 중건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서신면에 거주하는 상주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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