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성지! 안동, 안동독립운동사 51년을 걷다
소개
나라사랑·겨레사랑! 1926년 육십만세운동 총 기획자 권오설선생기적비,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서간도 독립군기지 개척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거룩한 순국지사 향산 이만도, 항일 민족저항 시인 이육사. 이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깃든 사적지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교육 코스다.
코스 지도
의성김씨 학봉 종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살았던 가옥이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 m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 되었다. 학봉은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사하였다. 학봉종택 외에 운장각이 있다. 운장각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이다.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 운장각에는 현재 선생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 점의 유적이 소장되어 있다.
5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임청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다. 종손인 석주는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의병기지를 세워 독립운동에 첫 발을 내디뎠고 서양의 정치 과학 문명을 받아들여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임청각 사람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빼어나고 장엄하다. 경학사를 조직하여 동포사회의 안정을 이루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만주에서 자금이 떨어져 하루를 견디기 힘들자 석주는 임청각을 팔기로 했다. 몇차례 매도계약서를 작성했으나 여의치 않자 문중에서 일부 자금을 마련해 줬다. 또한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으로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 1368∼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건축했다. 임청각은 영남산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전통한옥이며,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출처 : 임청각 공식홈페이지)
1541년(중종 36) 탁청정 김수가 건립하고 조선 후기에 화재가 나서 중건한 탁청정종가는 가옥에 딸린 정자로 개인 정자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고 명필 한석봉의 현판이 걸려 있다. 김수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의 둘째 아들로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조리서 『수운잡방』을 저술하였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곳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인 군자마을 ‘오천리유적지’로 이건 되었다. 군자마을은 500~600년 전 광산김씨 농수 김효로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안동 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의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시대 전기부터 끊임없이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에는 탁청정을 포함한 광산김씨 종중의 종가인 후조당, 수운잡방의 저자인 김유의 고택 등 20여 채의 고택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와 함께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고문서(보물),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전적(보물), 후조당 유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등이 있으며 유물 전시관인 숭원각에는 선대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다. 후조당에서는 고택체험-한옥스테이도 운영한다.
퇴계종택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이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 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 퇴계종택은 정침, 정자, 사당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영역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정침 영역은 정침과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음 ㅁ자형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배치되어 있으며, 행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에는 이안도 부인 안동 권씨의 절개를 기리는 정려가 걸려 있다. ‘퇴계선생구택’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대문을 지나면 정자 영역에 도달한다. 정자 영역에는 조선 시대의 문신 권두경(1654~1725)이 숙종 41년(1715)에 이황을 추모하여 지은 추월한수정이 있다. 원래의 정자는 1896년 일제에 의해 불탔고, 1926년에 400여 문중의 성금으로 다시 지어졌다. 현재 추월한수정은 수련생을 강의하거나 문중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코스 구성
의성김씨 학봉 종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살았던 가옥이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 m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 되었다. 학봉은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사하였다. 학봉종택 외에 운장각이 있다. 운장각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이다.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 운장각에는 현재 선생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 점의 유적이 소장되어 있다.
5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임청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다. 종손인 석주는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의병기지를 세워 독립운동에 첫 발을 내디뎠고 서양의 정치 과학 문명을 받아들여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임청각 사람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빼어나고 장엄하다. 경학사를 조직하여 동포사회의 안정을 이루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만주에서 자금이 떨어져 하루를 견디기 힘들자 석주는 임청각을 팔기로 했다. 몇차례 매도계약서를 작성했으나 여의치 않자 문중에서 일부 자금을 마련해 줬다. 또한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으로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 1368∼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건축했다. 임청각은 영남산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전통한옥이며,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출처 : 임청각 공식홈페이지)
1541년(중종 36) 탁청정 김수가 건립하고 조선 후기에 화재가 나서 중건한 탁청정종가는 가옥에 딸린 정자로 개인 정자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고 명필 한석봉의 현판이 걸려 있다. 김수는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인 농수 김효로의 둘째 아들로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조리서 『수운잡방』을 저술하였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곳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재의 위치인 군자마을 ‘오천리유적지’로 이건 되었다. 군자마을은 500~600년 전 광산김씨 농수 김효로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안동 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의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시대 전기부터 끊임없이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에는 탁청정을 포함한 광산김씨 종중의 종가인 후조당, 수운잡방의 저자인 김유의 고택 등 20여 채의 고택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와 함께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고문서(보물),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소장 전적(보물), 후조당 유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등이 있으며 유물 전시관인 숭원각에는 선대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다. 후조당에서는 고택체험-한옥스테이도 운영한다.
퇴계종택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이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 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 퇴계종택은 정침, 정자, 사당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영역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정침 영역은 정침과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음 ㅁ자형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배치되어 있으며, 행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에는 이안도 부인 안동 권씨의 절개를 기리는 정려가 걸려 있다. ‘퇴계선생구택’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대문을 지나면 정자 영역에 도달한다. 정자 영역에는 조선 시대의 문신 권두경(1654~1725)이 숙종 41년(1715)에 이황을 추모하여 지은 추월한수정이 있다. 원래의 정자는 1896년 일제에 의해 불탔고, 1926년에 400여 문중의 성금으로 다시 지어졌다. 현재 추월한수정은 수련생을 강의하거나 문중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소요시간
- 7시간
- 코스거리
- 41.31km
- 테마
- 자유여행
후기
- 소요시간
- 7시간
- 코스거리
- 41.31km
- 테마
- 자유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