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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 신라인들을 만나다

소개

경주는 신라시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경주 시내 곳곳에 봉긋 솟아 있는 수많은 고분은 신라인들의 삶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다수 발굴된 신라시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대릉원과 봉황대 등 고즈넉한 고분들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다 보면 천년 전 신라인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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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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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월성
경주 월성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 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2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3 경주 계림
경주 계림

경주 계림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회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계림은 신라의 국호(國號)로도 쓰이게 되었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왕위는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계승되어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인 내물왕 대부터 신라 김씨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에 자리한 계림은 신라 김씨 왕족의 탄생지로 여겨져 신성시되고 있다. 지금도 왕버들과 느티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이 우거져 있으며,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굽이쳐 흐른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옆에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피어나 유적지의 운치를 한층 더해 준다.

4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관측대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의 천문 관측과 과학 기술을 보여주는 국가유산이다. 전체 높이는 약 9m다. 네모난 기단 위에 술병 형태의 원통부를 세우고, 꼭대기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석재를 배치했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을 27단으로 쌓아 만들었다. 남동쪽에 난 창 아래의 내부는 막돌로 채워져 있으며, 창 위쪽부터 정상까지는 비어 있다. 정상부의 동쪽 절반은 판돌로 덮여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 과거의 특별한 인연으로 묶인 보겸과 지아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던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유적으로서 관람가치가 뛰어난 것은 물론 계절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피어나 나들이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5 경주향교
경주향교

경주향교는 경주교촌한옥마을과 경주최부자댁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교촌, 교리, 교동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향교 때문이다. 이 자리에 신라 최고의 중앙교육기관인 국학이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6년(987)에 지방교육기관인 학원을 설치하고 11년(992)에 시설을 정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 성종 23년(1492)에 문묘와 성균관의 배치형식을 따라 다시 지었다. 현재와 같은 건물배치는 향교의 표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해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을 다시 지었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 등과 같은 학문을 닦는 강학공간을 고쳐지었다. 광복 후에는 학교의 임시 교사로 활용되었으며 1999년부터는 사회교육원이 개설되어 강학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향교 앞쪽의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이다. 뒤쪽에는 강학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재·서재가 있다. 교생의 정원은 90인이었으며 경서와 시문을 위주로 가르쳤다.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로 서울 문묘와 같이 다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6 천마총(대릉원)
천마총(대릉원)

경주 대릉원 안에 위치한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 이전 신라의 고분이다. 1973년에 발굴되었으며,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은 높이 12.7m, 지름 50m 규모로 봉토 안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으며 적석층 내부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 2.1m의 나무로 만든 방이 있고 그 중앙에 목관을 두어 시신을 안치했다. 천마총은 대릉원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에 공개된 고분으로 인근의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바로 발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토된 유물은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의 관식, 금허리띠, 금동신발 등 피장자가 착용한 장신구류를 포함해 총 11,526점에 달한다. 이 중 대표 유물인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세 줄 장식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두 줄 장식이 있다. 또한 나뭇가지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으며,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천마총의 이름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천마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로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회화작품이며, 신라 회화의 대표작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7 봉황대(의령)
봉황대(의령)

봉황대는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의 벽계저수지 초입에 있는 단애(斷崖)이다. 거대한 기암괴석이 일대장관을 연출하는 봉황대는 모양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 사이로 자연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 또다시 동굴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는 사시사철 넘쳐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에게 시원한 약수를 제공한다. 봄철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경관이 일품이며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봉황대의 진면목은 가을의 단풍이다. 만산홍엽에 뒤덮인 봉황대에 비치는 저녁노을은 가히 선경을 보여준다. 주변에도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다. 찰비계곡 내 무운바위, 용소, 각시소, 개기 바위가 있으며 촌닭백숙, 염소 불고기 등의 별미도 맛볼 수 있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에 누대 하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것은 봉황루이다. 봉황대의 볼거리 중 또 다른 하나는 봉황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일붕선교종 사찰 일붕사이다.

8 경주 황룡사지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구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왕궁 월성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1969년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4개 주춧돌로 된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황룡사지 터 옆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9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원효대사와 자장법사가 머물렀던 역사 깊은 절이다. 절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이 있으며, 이는 통일신라 이전에 세워진 대표적인 전탑 양식이다. 모전석탑은 본래 5층 이상이었으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사리장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탑 1층에는 감실과 수문장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사자상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돌우물인 삼룡변어정이 있으며, 호국용 전설이 전해진다. 이 우물은 1965년 석불 14구가 출토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분황사에는 약사전, 약사여래입상, 석등, 대석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화쟁국사비부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석의 받침돌로, 고려 명종 때 만들어졌다. 현재 분황사는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고찰로 평가받고 있다.

코스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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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 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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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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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계림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회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계림은 신라의 국호(國號)로도 쓰이게 되었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왕위는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계승되어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인 내물왕 대부터 신라 김씨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에 자리한 계림은 신라 김씨 왕족의 탄생지로 여겨져 신성시되고 있다. 지금도 왕버들과 느티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이 우거져 있으며,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굽이쳐 흐른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옆에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피어나 유적지의 운치를 한층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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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관측대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의 천문 관측과 과학 기술을 보여주는 국가유산이다. 전체 높이는 약 9m다. 네모난 기단 위에 술병 형태의 원통부를 세우고, 꼭대기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석재를 배치했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을 27단으로 쌓아 만들었다. 남동쪽에 난 창 아래의 내부는 막돌로 채워져 있으며, 창 위쪽부터 정상까지는 비어 있다. 정상부의 동쪽 절반은 판돌로 덮여 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 과거의 특별한 인연으로 묶인 보겸과 지아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던 첨성대는 경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유적으로서 관람가치가 뛰어난 것은 물론 계절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피어나 나들이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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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향교는 경주교촌한옥마을과 경주최부자댁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교촌, 교리, 교동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향교 때문이다. 이 자리에 신라 최고의 중앙교육기관인 국학이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6년(987)에 지방교육기관인 학원을 설치하고 11년(992)에 시설을 정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 성종 23년(1492)에 문묘와 성균관의 배치형식을 따라 다시 지었다. 현재와 같은 건물배치는 향교의 표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해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을 다시 지었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 등과 같은 학문을 닦는 강학공간을 고쳐지었다. 광복 후에는 학교의 임시 교사로 활용되었으며 1999년부터는 사회교육원이 개설되어 강학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향교 앞쪽의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이다. 뒤쪽에는 강학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재·서재가 있다. 교생의 정원은 90인이었으며 경서와 시문을 위주로 가르쳤다.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로 서울 문묘와 같이 다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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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안에 위치한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 이전 신라의 고분이다. 1973년에 발굴되었으며,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무덤은 높이 12.7m, 지름 50m 규모로 봉토 안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으며 적석층 내부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 2.1m의 나무로 만든 방이 있고 그 중앙에 목관을 두어 시신을 안치했다. 천마총은 대릉원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에 공개된 고분으로 인근의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바로 발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토된 유물은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의 관식, 금허리띠, 금동신발 등 피장자가 착용한 장신구류를 포함해 총 11,526점에 달한다. 이 중 대표 유물인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세 줄 장식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두 줄 장식이 있다. 또한 나뭇가지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으며,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천마총의 이름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천마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로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회화작품이며, 신라 회화의 대표작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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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는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의 벽계저수지 초입에 있는 단애(斷崖)이다. 거대한 기암괴석이 일대장관을 연출하는 봉황대는 모양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황대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암벽 사이로 자연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석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 석문을 간신히 빠져 나서면 또다시 동굴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는 사시사철 넘쳐흐르는 약수터가 있어 봉황대를 찾는 이들에게 시원한 약수를 제공한다. 봄철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경관이 일품이며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봉황대의 진면목은 가을의 단풍이다. 만산홍엽에 뒤덮인 봉황대에 비치는 저녁노을은 가히 선경을 보여준다. 주변에도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다. 찰비계곡 내 무운바위, 용소, 각시소, 개기 바위가 있으며 촌닭백숙, 염소 불고기 등의 별미도 맛볼 수 있다. 봉황대 중턱에는 약간의 평지에 누대 하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것은 봉황루이다. 봉황대의 볼거리 중 또 다른 하나는 봉황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일붕선교종 사찰 일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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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황룡사 경내에는 신라 보물 중 하나인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자장대사의 건의로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3년 만에 완성된 신라의 상징물이었다. 현재 구층 목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탑을 지탱해 주었던 중앙 기둥 주춧돌인 심초석이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 왕궁 월성의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새로운 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새로운 궁 건립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동도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1969년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64개 주춧돌로 된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황룡사지 터 옆에는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 영상 시청각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 역사전시실 등으로 구성된 황룡사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있으며 1층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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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원효대사와 자장법사가 머물렀던 역사 깊은 절이다. 절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이 있으며, 이는 통일신라 이전에 세워진 대표적인 전탑 양식이다. 모전석탑은 본래 5층 이상이었으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사리장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탑 1층에는 감실과 수문장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사자상도 함께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돌우물인 삼룡변어정이 있으며, 호국용 전설이 전해진다. 이 우물은 1965년 석불 14구가 출토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분황사에는 약사전, 약사여래입상, 석등, 대석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화쟁국사비부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석의 받침돌로, 고려 명종 때 만들어졌다. 현재 분황사는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고찰로 평가받고 있다.

코스일정
기타
소요시간
5시간
코스거리
10km
테마
자유여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