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화려한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소개
경주는 신라시대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답사 여행은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이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신라의 역사를 차분히 훑어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야경이 아름답고,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코스 지도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만들기 시작하여 그 아들인 혜공왕에 의해 771년에 완성되었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뉴와 음통이, 몸에는 위로부터 보상당초무늬를 새긴 문양띠, 그 아래는 4개의 유곽, 4구의 비천상, 2곳의 당좌, 맨 아래에는 보상당초와 연꽃 문양띠가 양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아름답고 여운이 긴 종소리 등 우리나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과 오리 압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으나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고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렸던 능지탑이 있던 자리이다. 무너진 채 버려져 있던 탑을 신라삼산조사단이 1969년부터 수차례 조사하여 197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능지탑은 원래 기단의 네 면에 십이지신상을 세워 넣고 연꽃 모양의 무늬를 새긴 돌을 쌓아 탑신을 만든 5층탑으로 추정된다. 또한 발굴 중에 소조불상의 파편과 많은 양의 기와 조각들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탑의 네 면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기단부는 돌을 다듬어 쌓고 윗면은 흙을 덮어 잔디를 심었다. 기단부 둘레에는 십이지신상 중 9구를 방위에 맞게 안기둥처럼 세웠다. 이중 8구는 낭산 동쪽 황복사 터 앞에 있던 미완성된 왕릉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기단부 위쪽의 탑신부는 기단부와 같은 형태로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위쪽에 굄돌을 한 단 더 올린 점이 기단부와는 다르다. 탑의 꼭대기는 사모지붕 모양으로 흙을 쌓아 마감하였다. 현재 탑 주변에는 정비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연꽃 모양을 새긴 돌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토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내에 왕궁 바깥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탑에서 가까운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경주 능지탑지에서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능지탑이 능시탑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재위 632∼647)은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 의식에 의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간 첨성대와 분황사,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며,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과 함께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 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은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어 비로소 신하들이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수 선덕여왕릉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이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다섯 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은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었다. 바깥쪽 사다리꼴 모양의 석재를 받쳐 놓았다. 정남쪽에 배치한 받침석의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라는 것을 표시한 듯하다.
코스 구성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제35대 왕인 경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만들기 시작하여 그 아들인 혜공왕에 의해 771년에 완성되었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뉴와 음통이, 몸에는 위로부터 보상당초무늬를 새긴 문양띠, 그 아래는 4개의 유곽, 4구의 비천상, 2곳의 당좌, 맨 아래에는 보상당초와 연꽃 문양띠가 양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아름답고 여운이 긴 종소리 등 우리나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과 오리 압을 써서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으나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 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고 그 건물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뽑힌다.
이곳은 예로부터 능시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렸던 능지탑이 있던 자리이다. 무너진 채 버려져 있던 탑을 신라삼산조사단이 1969년부터 수차례 조사하여 197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능지탑은 원래 기단의 네 면에 십이지신상을 세워 넣고 연꽃 모양의 무늬를 새긴 돌을 쌓아 탑신을 만든 5층탑으로 추정된다. 또한 발굴 중에 소조불상의 파편과 많은 양의 기와 조각들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탑의 네 면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기단부는 돌을 다듬어 쌓고 윗면은 흙을 덮어 잔디를 심었다. 기단부 둘레에는 십이지신상 중 9구를 방위에 맞게 안기둥처럼 세웠다. 이중 8구는 낭산 동쪽 황복사 터 앞에 있던 미완성된 왕릉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기단부 위쪽의 탑신부는 기단부와 같은 형태로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위쪽에 굄돌을 한 단 더 올린 점이 기단부와는 다르다. 탑의 꼭대기는 사모지붕 모양으로 흙을 쌓아 마감하였다. 현재 탑 주변에는 정비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연꽃 모양을 새긴 돌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토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자신이 죽으면 10일 내에 왕궁 바깥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탑에서 가까운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경주 능지탑지에서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능지탑이 능시탑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재위 632∼647)은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 의식에 의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간 첨성대와 분황사,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으며,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명장 김유신과 함께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 설화의 수미산 밑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 신하들이 묻자, 낭산 기슭이라 대답하였고, 이 기슭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사천왕이란 도리천의 호불신으로 선덕여왕의 무덤은 결국 도리천에 있는 셈이 되어 비로소 신하들이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수 선덕여왕릉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등이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다섯 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은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었다. 바깥쪽 사다리꼴 모양의 석재를 받쳐 놓았다. 정남쪽에 배치한 받침석의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라는 것을 표시한 듯하다.
- 소요시간
- 6시간
- 코스거리
- 13km
- 테마
- 자유여행
후기
- 소요시간
- 6시간
- 코스거리
- 13km
- 테마
- 자유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