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OYES
여행코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가 인쇄된 흥덕사지

소개

청주의 흥덕사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440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63년이나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 바로 흥덕사지에서 인쇄되었다. 그밖에 청주 시내 중심부에는 국보로 지정된 용두사지 철당간이 서 있는데, 당간지주와 명문이 새겨진 당간이 남아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상당산성도 차분히 둘러볼만한 곳이다.

날씨 정보를 불러오는 중...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코스 지도

지도를 불러오는 중...
1 청주 흥덕사지
청주 흥덕사지

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 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大中 3年銘)’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2 용화사(청주)
용화사(청주)

용화사는 청주 무심천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1992년 절 부근에서 발굴된 청동반자의 명문을 통해 이 일대가 고려시대의 큰 절인 사뇌사 터였음이 밝혀졌다. 용화사에는 1902년 고종의 비인 순빈 엄 씨가 명하여 발견했다는 칠존의 석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옮겨 이 절을 지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용화보전에 모신 일곱 구의 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일반 사찰과 달리 시내 가운데에 있어 누구나 편히 방문할 수 있으며,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절에서 묵으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지기 좋다. 봄에는 사찰 주위의 무심천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

3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962년(고려 광종 13)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962년(고려 광종 13)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유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4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

* 삼국시대 포곡식 석축산성, 상당산성 * 상당산성이란 명칭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듯하다. 둘레가 4km를 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상당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읍지(邑誌)에 따르면 이 산성은 1716년(숙종 42) 고지(古址)에 의거하여 석축으로 개수하였다고 하며, 남문 등의 성문·성벽에 당시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남문의 문루는 1977년 복원되었다. * 상당산성의 구조 및 축조법 * 산성의 면적은 12.6ha, 성 둘레 4,400m이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 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동·서·남방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지금은 석축 부분만 남아 있고, 성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동문과 서문도 역시 문루가 있었으며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m, 너비 2.8m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暗門)이 있고 동남방에 수구(水口)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장대(東將臺)와 서장대(西將臺)의 터가 남아 있다. 상당산성은 청주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산이 머리에 띠를 두른 듯 또렷하게 보이는 성벽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파수꾼이다. 상당산 능성 따라 이어진 성벽은 산을 돌아가며 둘레 4.2km, 높이 4~5m의 성곽이다.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석성을 쌓았다. 성 안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공남문(남문)과 미호문(서문), 진동문(동문) 3개의 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곳과 수구 3개소가 있다. 조선군이 훈련하던 동장대는 1992년에 복원해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성을 한바퀴 돌고 내려오면 성안에는 전통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는데 전통마을에서 맛보는 전통주와 빈대떡은 산성을 돌고난 고단함을 풀어준다. ※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여 언제든지 해설을 들을 수가 있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상당산성’은 에서 청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임금 인조가 피신했던 장소로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코스 구성

1

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 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大中 3年銘)’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2

용화사는 청주 무심천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1992년 절 부근에서 발굴된 청동반자의 명문을 통해 이 일대가 고려시대의 큰 절인 사뇌사 터였음이 밝혀졌다. 용화사에는 1902년 고종의 비인 순빈 엄 씨가 명하여 발견했다는 칠존의 석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를 옮겨 이 절을 지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용화보전에 모신 일곱 구의 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일반 사찰과 달리 시내 가운데에 있어 누구나 편히 방문할 수 있으며,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절에서 묵으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지기 좋다. 봄에는 사찰 주위의 무심천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

3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962년(고려 광종 13)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962년(고려 광종 13)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유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4

* 삼국시대 포곡식 석축산성, 상당산성 * 상당산성이란 명칭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듯하다. 둘레가 4km를 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상당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읍지(邑誌)에 따르면 이 산성은 1716년(숙종 42) 고지(古址)에 의거하여 석축으로 개수하였다고 하며, 남문 등의 성문·성벽에 당시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남문의 문루는 1977년 복원되었다. * 상당산성의 구조 및 축조법 * 산성의 면적은 12.6ha, 성 둘레 4,400m이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 올리는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며 높이는 4.7m이다. 동·서·남방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지금은 석축 부분만 남아 있고, 성문의 높이는 3.5m, 너비는 4.2m이다. 동문과 서문도 역시 문루가 있었으며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m, 너비 2.8m이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暗門)이 있고 동남방에 수구(水口)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장대(東將臺)와 서장대(西將臺)의 터가 남아 있다. 상당산성은 청주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산이 머리에 띠를 두른 듯 또렷하게 보이는 성벽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파수꾼이다. 상당산 능성 따라 이어진 성벽은 산을 돌아가며 둘레 4.2km, 높이 4~5m의 성곽이다.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석성을 쌓았다. 성 안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공남문(남문)과 미호문(서문), 진동문(동문) 3개의 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곳과 수구 3개소가 있다. 조선군이 훈련하던 동장대는 1992년에 복원해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성을 한바퀴 돌고 내려오면 성안에는 전통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는데 전통마을에서 맛보는 전통주와 빈대떡은 산성을 돌고난 고단함을 풀어준다. ※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여 언제든지 해설을 들을 수가 있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드라마 ‘상당산성’은 에서 청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임금 인조가 피신했던 장소로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코스일정
기타
소요시간
6시간
코스거리
12.5km
테마
자유여행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