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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코스

남한강을 따라 흩어진 역사의 향기

소개

여주 남한강변을 여행하는 것은 긴 세월에 걸친 역사와 조우하는 일이다. 그 만남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운치 있어 더욱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무덤인 영릉과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또 다른 영릉, 남한강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월루와 신륵사, 고달사지와 파사성에 이르며 남한강변의 아름다움도 함께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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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10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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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주 영릉과 영릉
여주 영릉과 영릉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세종, 오른쪽에 소헌왕후를 모셨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헌릉과 인릉 경내 인릉 자리에 조성되었고, 4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릉에 합장하였다. 그러나 영릉이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세조 대부터 영릉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146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옛 영릉에 있던 능침 석물과 신도비는 땅에 묻었고, 여주로 옮기면서 능침의 석물은 다시 만들었다.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최초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위에 위치한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렇게 능을 위아래로 조성한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에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 구리 동구릉 내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으나, 조성 직후부터 능침 석물에 문제가 생겨 보수가 계속되자 능 안에 빗물의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1673년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능을 옮길 때 방을 열어보니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영릉 입구에 있는 재실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로 현재 조선왕릉의 재실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2 영월루
영월루

영월루는 신륵사 국민관광지 맞은 편에 위치한 영월근린공원 내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영월루에서는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멀리 양섬, 강 건너 신륵사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영월루의 건축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건물 구조로 볼 때 18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으로 낮은 기단과 좌우로 기다란 몸체와 치켜서 들린 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군청 이전 때 당시의 군수였던 신헌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예로부터 당대의 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겼던 명소라 한다. 영월루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 절벽이 있는데, 바위에는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마암 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가 나타나 고을 이름을 황려현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때문에 이 바위는 마암이 되었다. 여주가 본관으로 여주에서 탄생한 대문호 이규보의 시 중에도 [두 마리의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는 내용이 있다. 영월근린공원 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탑인 여주 하리 삼층석탑과 다수의 선정비, 불망비, 구휼비와 현충탑, 그리스 참전비 등이 있고 분수와 운동시설, 벤치 등의 휴게시설이 있어 공원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좋다.

3 신륵사(여주)
신륵사(여주)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4 여주 고달사지
여주 고달사지

혜목산 자락에 있는 고달사지는 옛 대찰의 면모를 보여주는 2대 폐사지 중 한 곳이다. 764년(통일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신라 말 새롭게 세력을 얻은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의 중심 사찰로 봉림산문의 개산조인 현욱(787∼868)이 절을 중건하였고 고려 원종대사 찬유(869~958)가 이곳에 28년간 주석하며 나라의 비호를 받는 고려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찰로 성장하였다. 사방 30리가 절이었고 머물던 스님만 수백 명이었다는 대가람은 언제 어떤 이유로 폐사했는지는 알 수 없고 대략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 절터에는 1개의 국보와 4개의 보물과, 1개의 유형문화재 등 다수의 중요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 속 고달사의 위엄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와 생동감 넘치는 귀부와 이수가 눈길을 끄는 원종대사탑비(보물), 고려 부도의 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고달사지승탑(국보)과 원종대사탑(보물), 거대한 돌그릇 석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다만, 고달사지에 쓰러진 채 발견된 쌍사자 석등(보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또 원종대사 탑비는 1915년 봄에 넘어져 귀부, 이수만 현장에 두고 깨진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었는데, 깨진 조각을 맞춘 본래의 비신은 여주박물관에 전시하고 귀부 및 이수 진품에 복제한 비신은 고달사 터에 세워 만나볼 수 있다. 또 고달사지 승탑과 원종대사탑 뒤편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여주상교리고려석실묘가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5 여주 파사성
여주 파사성

파사성은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엄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코스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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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세종, 오른쪽에 소헌왕후를 모셨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헌릉과 인릉 경내 인릉 자리에 조성되었고, 4년 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영릉에 합장하였다. 그러나 영릉이 풍수상 불길하다고 하여 세조 대부터 영릉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146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옮기면서 옛 영릉에 있던 능침 석물과 신도비는 땅에 묻었고, 여주로 옮기면서 능침의 석물은 다시 만들었다.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최초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위에 위치한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 봉분이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렇게 능을 위아래로 조성한 이유는 쌍릉의 형태처럼 봉분을 나란히 조성할 경우, 풍수지리상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이 벗어나기 때문에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 구리 동구릉 내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으나, 조성 직후부터 능침 석물에 문제가 생겨 보수가 계속되자 능 안에 빗물의 피해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1673년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능을 옮길 때 방을 열어보니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영릉 입구에 있는 재실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로 현재 조선왕릉의 재실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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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루는 신륵사 국민관광지 맞은 편에 위치한 영월근린공원 내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영월루에서는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멀리 양섬, 강 건너 신륵사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영월루의 건축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건물 구조로 볼 때 18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으로 낮은 기단과 좌우로 기다란 몸체와 치켜서 들린 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군청 이전 때 당시의 군수였던 신헌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예로부터 당대의 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겼던 명소라 한다. 영월루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 절벽이 있는데, 바위에는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마암 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가 나타나 고을 이름을 황려현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때문에 이 바위는 마암이 되었다. 여주가 본관으로 여주에서 탄생한 대문호 이규보의 시 중에도 [두 마리의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는 내용이 있다. 영월근린공원 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탑인 여주 하리 삼층석탑과 다수의 선정비, 불망비, 구휼비와 현충탑, 그리스 참전비 등이 있고 분수와 운동시설, 벤치 등의 휴게시설이 있어 공원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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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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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목산 자락에 있는 고달사지는 옛 대찰의 면모를 보여주는 2대 폐사지 중 한 곳이다. 764년(통일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신라 말 새롭게 세력을 얻은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파의 중심 사찰로 봉림산문의 개산조인 현욱(787∼868)이 절을 중건하였고 고려 원종대사 찬유(869~958)가 이곳에 28년간 주석하며 나라의 비호를 받는 고려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찰로 성장하였다. 사방 30리가 절이었고 머물던 스님만 수백 명이었다는 대가람은 언제 어떤 이유로 폐사했는지는 알 수 없고 대략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 절터에는 1개의 국보와 4개의 보물과, 1개의 유형문화재 등 다수의 중요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 역사 속 고달사의 위엄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와 생동감 넘치는 귀부와 이수가 눈길을 끄는 원종대사탑비(보물), 고려 부도의 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고달사지승탑(국보)과 원종대사탑(보물), 거대한 돌그릇 석조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다만, 고달사지에 쓰러진 채 발견된 쌍사자 석등(보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또 원종대사 탑비는 1915년 봄에 넘어져 귀부, 이수만 현장에 두고 깨진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었는데, 깨진 조각을 맞춘 본래의 비신은 여주박물관에 전시하고 귀부 및 이수 진품에 복제한 비신은 고달사 터에 세워 만나볼 수 있다. 또 고달사지 승탑과 원종대사탑 뒤편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여주상교리고려석실묘가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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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성은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엄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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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시간
6.5시간
코스거리
39.2km
테마
자유여행

후기